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몬 볼리바르 (문단 편집) === 탄생과 성장 === 1783년 [[카라카스]](독립 후 베네수엘라의 수도가 된다.)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와 마리아 콘셉시온 데팔라시오스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잃고 병약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서 [[흑인]] [[노예]]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그게 흑인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흑인 노예 해방을 이야기하게 된 건 아이티에서 지원받게 된 다음 이야기다. 정작 그러고도 여전히 pardocracia(거칠게 번역하면, '깜둥이 정치?')를 두려워했다. 9살이 되던 1792년, 어머니마저 병으로 사망하자 누나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후아나는 [[결혼]]을 하고, 형인 후안 비센테도 다른 가정의 양자가 되면서 [[남매]]들이 뿔뿔히 흩어졌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난 이후 볼리바르는 처음엔 외할아버지 - 외할머니 내외의 집에서 맡겨졌으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나이가 많아 시몬을 부양할 능력이 떨어졌고, 곧 외삼촌인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에게 맡겨졌다.[* 결국 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시몬이 외삼촌 카를로스와 첫째누나 마리아의 집을 떠도는 와중에 노환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성격이 엄격한 외삼촌과 허영심이 많은 외숙모와 계속 갈등을 빚었고[* 부모 양친을 모두 조실부모한 외조카 볼리바르를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고 부하직원 대하듯이 차별했다. 그래서 볼리바르는 외삼촌과 외숙모를 무척 싫어했다. 실제로 과거 8,90년대에 발간했었던 웅진위인전기 전집의 시몬 볼리바르 편에서는 어린 시절의 시몬이 외숙모의 유리 접시를 깨트려 외삼촌 - 외숙모 내외와 갈등을 빚는 일화가 나온다.], 결국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외삼촌의 집을 나가 첫째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큰매형 내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시몬의 가출에 반발한 외삼촌 카를로스는 시몬의 거주 양육권을 놓고 시몬과 마리아 - 큰매형 부부와 법적 싸움까지 벌였으나, 당시 식민지 법원에서 시몬의 양육권이 누나 - 매형 부부에게 있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서 결국 패소하였다. 한편 이후에 시몬은 스승인 시몬 로드리게스(1769 ~ 1854)를 만나 [[계몽사상]]에 눈뜬다. 당시 [[스페인]]에서 독립하겠다는 [[크리오요]][* 중남미의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들을 일컫는 호칭이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페인 본토 사람들에게 온갖 차별을 당하였고 군인들도 '''최고로 높게 진급을 해야 [[대위]]''' 정도에만 진급할 수 있었다.]가 많았고 시몬 로드리게스도 그 중 하나였기에 볼리바르가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되었다. 다만, 볼리바르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한 [[크리오요]] 집이라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로드리게스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망명하면서 [[안드레스 베요]](1781 ~ 1865)에게 새로이 지도받는다. 이때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